![]() 1) 일제강점기의 춘향제사(제1회 1931년부터 제15회 1945년까지) 2) 광복과 관주도기의 춘향제사와 춘향묘 참배(제16회 1946년부터 제55회 1985년까지) 3) 민간주도 정착기의 춘향제사와 춘향묘 참배(제53회 1986년부터 제70회 1999년까지) ![]() 1)용마놀이 조선 숙종 25(1669)년 발간된 남원의 향토지인 용성지에 간략한 소개가 있다." 읍의 풍속에 옛날부터 재앙을 누루고 이기기 위해, 또한 그 해 풍년을 점기 위해 용마놀이 대개 읍호가 용성이었던 까닭에서이다. 매년 제석이나 상원이 되면 그 살고 있는 바로써 남과 북의 두 대열로 나누고 각기 큰 용마를 만들어 용의 문양을 그려 오색으로 채색하여 독윤거에 싣고 네거리와 긴 거리를 돌면서 대진을 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의 놀이를 갖추어 베풀다가 승부를 가리게 된다. 남쪽이 이이게 되면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들며 북쪽이 이기게 되면 흉년이 든다고 이르고, 그 전례하는 바를 숭상하였다. 관가에서 모샇게 하지 않았으며, 혹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용성지, 29면) 2) 삼동굿놀이 지격의 고유한 민속놀이를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춘향제의 민속축제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려 목적으로, 1985년 제55회 때부터 축제 종목으로 채택되어 공연되어 있다. 제55회 춘향제 때인 1985년 5월 28일 상오 10시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이 때 삼동굿놀이 보존회의 이기승은 제23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어 대통령상을 수상한 공로로 남원군민의장을 수상하였다. 이 날은 광한루원 잔디광장에서 남원여고생들이 출연하여 강강수월래를 갖고, 남원국교생 들의 농악시범에 이어, 동자의 탄생부터 성장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과정을 그린 무언극 삼동굿놀이를 하였다. 백중날을 며칠 앞두고 각 마을의 어른들은 삼동굿놀이에 참가할 남아들을 선출한다. 그리하여 백중날 아침에는 삼동을 무등 세우고 나팔의 신호로 삼거리로 모이게 된다. 세 마을의 농기는 마주보고 큰 기에 두 개의 농기는 절을 하며 화합의 "합국"을 하고 당산으로 향한다. 당산에서 제사를 지내고 신나게 "판굿"을 한 다음 공동 우물에 가서 "샘굿"을 한다. 삼동굿놀이 판은 신대와 금줄로 신성하게 꾸며져 있다. 비손받이를 하는 노부들과 꽂받이 (어린 동자를 받아주는 중동과 산모 그리고 닭 등의 배역)하는 남자들과 서로 대면하여 <삼동굿놀이>가 시작된다. 비손들은 절을 하고 손을 비비면서 자기 마을 동자의 순사를 기원하는 축문을 읊는다. 이어서 남자 세사람(중동받이) 이?어깨를 짜고 그 위로 산모역 한 사람이 올라가 동자를 어깨 위로 올린다. 높이는 출산과정 등 세 과정으로 진행된다 3) 씨름대회 씨름은 춘향제 초창기부터 행해졌던 전통있는 민속놀이이다. 춘향제 초창기에는 어른이 씨름판보다는 어린이 씨름판이 형성되었다. 씨름은 샅바나 띠를 넓적다리에 걸친 두 사람이 서로 부등켜 잡고 힘과 재주를 부려, 상대방을 먼저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내는 한국 고유 의 운동이다. 4) 궁도대회 궁도는 판소리, 그네뛰기와 더불어 초기 춘향제의 주요 종목이었다. 궁도는 한량들이 즐기던 풍류의 하나이었고, 초기의 춘향제를 이끌어가던 인물군들의 속성과 부합되는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신문기사는 아래와 같고, 궁도가 대회의 형식으로 치러지기 시작한 것 1946년 제16회 춘향제부터 이다. [1924년 6월 19일 조선일보] 백일장과 궁술회 본보 전북 남원 지국에서 좌기일자로 백일장과 궁술회를 주최하는데 다수 응시하리라 하며 이에 대한 상품도 다소 수여할 터이라더라 (남원) 궁술회 음. 5월 21 [1929년 8월 29일 동아일보] 남원 읍내에 있는 동사정은 오랫동안 적막하였을뿐더러 그 곳 삶바탕인 전(田) 칠백여평이 어떠한 고장으로 남의 소유로 넘어가게 된 것을 알게 된 사계(射契)에서는 사원(射員)과 유지의 동정심을 얻어서 곧바로 찾게 된 것을 기회로 극히 소규모로 지난 35,36양일에 본군에 한하야 상사(賞射 )보였다는데 금번 수상한 사람은 아래와 같다더라. -명단생략- ![]() 김수영 시인은 미인의 조건으로 희소성과 유한성을 제시한 바 있거니와, 인간의 신체를 통해 구현된 아름다움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예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적 조건, 계급적 관점 그리고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 등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전국적으로 지역축제가 활성화되면서 미인선발대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실정 인 바. 순창의 고추장 아가씨 선발대회, 금산의 인삼아가씨 선발대회, 임실의 사선녀 선발대회, 구례의 지리산녀 선발대회 등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미인대회가 많아지고 있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대중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가장 확실하면서도 손쉬운 방법이라 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춘향선발대회는 춘향제의 가장 대표적인 축제종목 가운데 하나이다. 춘향선달대회는 춘향의 얼을 기르고 그 정신을 길이 이어가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미인선발대회 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처음에는 그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고 전시된 사진 얼굴이 춘향 선발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가 점차 참가인원이 많아지고 KBS 방송국이 주관하게 되면서 대회 규모도 초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된다. 그와 함께 심사의 공정성과 객관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위해 춘향선발기준을 객관적으로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그러나 막상 구체적으로 선발기준을 마련하려다보니, 춘향의 미적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문제가 다시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적인 한국적 아름다움의 미적 기준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배우나 탈랜트에 적합한 인물을 뽑는 것이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닌가 ? 그렇다면 여타의 미인선발대회와 구별되는 춘향선발대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답은 아직도 정립되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상당기간 논란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